과거 수십 년 동안 세계 경제를 밀어 올린 축이 셋 있었습니다. 세계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서방이 설계한 다자 질서입니다. 코넬대학교 무역정책 교수 에스와르 프라사드(Eswar Prasad)는 2026년 저서 ‘둠 루프(The Doom Loop)’에서 이 셋을 서로 무너뜨리는 되먹임 고리로 읽었습니다. 세계화가 만든 성과가 고르게 나뉘지 않으면서 불평등이 커졌고, 쌓인 불만이 포퓰리즘과 보호무역으로 번지며 다시 성장을 갉아먹는 순환입니다. 동남아시아 최대 경제국을 두고 인도네시아 중진국 함정이라는 진단이 나오는 배경도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왜 인도네시아는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수출 제조업 모델이 닫혔다
한국과 대만, 뒤이어 중국이 밟은 경로에는 공통 조건이 둘 있었습니다. 관세 장벽이 낮은 자유무역 환경, 그리고 값싼 노동력이 그대로 경쟁력이 되던 생산 구조입니다. 두 조건은 지금 함께 사라지는 중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부딪친 뒤 각국은 효율보다 안보를 앞세워 생산 기지를 자국이나 우방으로 되돌렸습니다. 스마트 팩토리와 로봇, 인공지능이 퍼지면서 저임금 노동의 상대 우위도 얇아졌습니다. 인도네시아 내수 시장은 이미 저가 중국산 공산품과 쇼피(Shopee), 틱톡숍(TikTok Shop) 같은 유통망이 채웠습니다. 자국 영세 중소기업은 기술을 쌓을 시간을 벌지 못한 채 가격 경쟁에 노출됐습니다.
위기와 어긋나는 지표
제조업이 무너지고 비공식 노동이 불어난다는 서술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통계는 반대로 움직였습니다. 통계청 집계로는 제조업 비중이 오르고 비공식 노동 비중은 내려갔습니다.
| 지표 | 이전 | 최근 | 방향 |
|---|---|---|---|
| 제조업 GDP 비중 (통계청·산업부) | 18.67% (2023년) | 19.07% (2025년) | 상승 |
| 제조업 GDP 비중 (경영자총협회 집계) | 21.3% (2014년) | 17.39% (2025년) | 하락 |
| 비공식 노동 비중 (통계청) | 60.47% (2020년) | 57.95% (2025년 11월) | 하락 |
| 자료: 인도네시아 통계청(Badan Pusat Statistik)·산업부(Kementerian Perindustrian), 인도네시아경영자총협회(APINDO), 2014~2025년 | |||
조기 탈산업화(Premature Deindustrialization)는 고소득 국가에 이르기 전에 제조업 비중이 줄어드는 상태를 뜻합니다. 산업부는 2026년 2월 발표에서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반대편은 인도네시아경영자총협회 집계를 근거로 삼습니다.
비공식 노동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비공식 부문은 고용 계약과 사회보험 밖에서 일하는 노동을 가리킵니다. 비중은 2020년 60.47%에서 2025년 11월 57.95%로 내려왔습니다. 그사이에도 취업자 1억 4,790만 명 가운데 8,540만 명이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다운스트림은 어디서 멈췄나
다운스트림(Hilirisasi)은 원광 수출을 막고 국내 제련과 가공을 강제해 부가가치를 자국에 남기는 정책입니다. 숫자로만 보면 성공했습니다. 니켈 가공품 수출액은 2014년 약 10억 달러에서 2024년 336억 4천만 달러로 뛰었습니다.
가치 사슬이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2025년 6월 5일 서명된 규정은 니켈선철(NPI)과 페로니켈, 니켈 매트, 혼합수산화물침전물(MHP)처럼 중간재만 생산하는 신규 제련소의 인허가를 막았습니다. 이런 조치는 정책이 1차 가공 단계에서 멈춰 섰다는 판단 없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군이 행정으로 들어온 해
2025년 3월 20일 국회는 국군(TNI)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47조에 따라 현역 군인이 앉을 수 있는 부처와 기관은 10곳에서 14곳으로 늘었고, 대법원과 검찰이 그 목록에 들어갔습니다.
언론 환경도 같은 해에 내려앉았습니다. 국경없는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가 매긴 2025년 언론자유지수에서 인도네시아는 44.13점으로 127위에 놓였습니다. 한 해 전 51.15점, 111위였으니 16계단이 밀린 셈입니다.
권위주의적 통치가 성장을 앞당긴다는 논리는 대개 중국 사례에 기댑니다. 중국이 그 경로를 걷던 시기에는 세계화가 확장 국면이었고,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이어지는 제조 사슬이 이미 국내에 깔려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중국 공산품을 사들이고 원자재를 대주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전제가 다르면 같은 처방도 다르게 작동합니다.
인도네시아 중진국 함정은 예산표에
2026년 국가예산에서 무상 영양급식(Makan Bergizi Gratis)을 맡은 국가영양청(BGN)이 받은 금액은 268조 루피아입니다. 같은 해 국가연구혁신청(BRIN)에 배정된 금액은 약 6조 1천억 루피아입니다. 한쪽이 다른 쪽의 43배를 넘습니다.
배분 자체를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영양 결핍과 발육부진은 실재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생산성 투자는 결과가 10년 뒤에 나오고, 급식은 다음 달이면 눈에 보입니다. 정치적 압력이 커질수록 재정은 뒤쪽에서 앞쪽으로 옮겨 갑니다.
장기 투자가 밀리면 생산성이 제자리에 머물고, 청년층은 사회안전망 없는 일자리로 흘러갑니다. 불만이 쌓이면 정부는 공권력과 군을 앞세워 관리에 들어가며, 관리 비용을 감당하려 다시 단기 지출을 늘립니다.
2045년 선진국 진입(Indonesia Emas 2045)을 내건 계획이 이 고리를 끊으려면 세 갈래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광물 수익은 기초 교육과 직업 훈련, 연구개발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가 수입품 덤핑을 막으면서 중소 제조업의 기술 자립을 받치는 일도 남았습니다. 사법 독립과 언론 자유가 되살아나야 정책 실패를 스스로 고치는 틀이 작동합니다.
지표만 보면 제조업 비중은 오르고 비공식 노동 비중은 내려갑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중진국 함정을 말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커졌습니다. 개선되는 숫자와 나빠지는 체감이 이렇게 갈라진 상태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