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BIFF,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한 나라의 작품을 통째로 묶어 특별전으로 소개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2023년 그 드문 자리의 주인공이 인도네시아 영화였습니다. 그로부터 3년, 부산과 인도네시아의 거리는 초청과 상영을 넘어 인재를 함께 길러내는 관계로 좁혀졌습니다.
인도네시아 영화, 부산이 주목하는 진짜 이유
부산은 왜 하필 인도네시아를 골랐나
2023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특별기획 ‘인도네시아 영화의 르네상스(Renaissance of Indonesian Cinema)’로 장편 7편과 단편 5편, 모두 12편을 걸었습니다.
몰리 수리야(Mouly Surya), 카밀라 안디니(Kamila Andini), 조코 안와르(Joko Anwar), 에드윈(Edwin), 요셉 앙기 노엔(Yosep Anggi Noen)까지 현지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대거 부산을 찾았습니다. 요셉 앙기 노엔의 ‘가스퍼의 24시간(24 Jam Bersama Gaspar)’은 이 자리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고, 넷플릭스 시리즈 ‘시가렛 걸Gadis Kretek’도 부산에서 세계 최초로 관객과 만났습니다.

부산이 한 국가를 특별전으로 앉힌 배경에는 뚜렷한 시장 신호가 있었습니다. 약 2억 8천만 명, 세계 4위 인구를 등에 업은 내수 시장이 팬데믹 이후 가장 빠르게 반등했기 때문입니다. 박스오피스 매출은 2020년 7,500만 달러 아래에서 2024년 약 3억 9천만 달러로 뛰었고, 이 과정에서 대만과 홍콩, 태국을 차례로 앞질렀습니다. 성장 곡선이 가파른 시장을 영화제가 먼저 알아본 셈입니다.
4관왕과 멘토 귀환이 같은 방향을 가리켜
지난해 제30회 영화제에서 국민 배우 레자 라하디안(Reza Rahadian)의 장편 연출 데뷔작 ‘빵꾸(Pangku)’가 네 개 부문을 받았습니다. KB 비전 관객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비슈케크국제영화제 중앙아시아영화상, 차세대 영화인상까지. 관객 투표와 평단 심사, 국제 협력상을 한 작품이 나눠 가진 건 흔한 그림이 아닙니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2026년 아시아영화아카데미(BAFA) 교수진입니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이 프로그램의 연출 멘토로 요셉 앙기 노엔이 선임됐습니다. 그는 2007년 이 아카데미를 수료한 사람입니다. 부산에서 배운 청년이 아시아 각국에서 모인 신진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기에 신수원 감독이 역대 첫 여성 교장을, ‘악녀’의 박정훈 촬영감독이 촬영 멘토를 맡습니다.
수상과 멘토 귀환은 따로 노는 사건이 아닙니다. 한쪽은 완성된 작품을 부산이 인증하는 흐름이고, 다른 한쪽은 20년 전 심은 씨앗이 열매로 돌아오는 흐름입니다. 초청받던 나라가 이제 교육의 주체로 올라섰다는 뜻입니다. 올해 아카데미는 단편 제작 중심에서 벗어나 장편 데뷔를 겨냥한 ‘파일럿 단편’ 방식으로 커리큘럼을 전면 개편했고, 34개국 501명이 지원해 선발된 펠로우들이 8편을 제작합니다. 이 8편은 제31회 영화제에서 공식 상영됩니다.
호황 지표 뒤에 숨은 ‘아직 안 열린 시장’
지표만 보면 인도네시아는 이미 다 큰 시장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한 칸을 더 겹쳐 보면 결론이 달라집니다.
| 지표 (2024년 기준) | 수치 |
|---|---|
| 자국 영화 점유율 | 약 65% |
| 자국 영화 관객 수 | 약 8,000만 명 |
| 연간 박스오피스 매출 | 약 3억 9천만 달러 |
| 장편 제작 편수 | 241편 (세계 9위) |
| 인구 100만 명당 스크린 | 약 7.7개 |
| 자료: JAFF Market–Cinepoint 리포트(Variety 인용), Screen International, 2024년 기준 | |
관객과 매출은 팬데믹 이전을 넘어섰지만, 인구 대비 스크린은 아시아 주요국 가운데 가장 얕은 축에 듭니다. 제작 편수는 세계 9위인데 100만 명당 스크린은 한국·일본·중국·말레이시아에 한참 못 미칩니다. 문화부 파들리 존 장관은 약 1만 개의 스크린이 필요한데 지금은 2,500개 안팎이라고 밝혔습니다. 콘텐츠는 넘치는데 상영관이 모자란 구조입니다. (관련글: 인도네시아 영화관 시장 현황! 농촌 영화관, 멀티플렉스 대안될까?)
이 조합이 부산이 인도네시아를 붙잡는 진짜 이유일 수 있습니다. 완성된 시장이라면 이미 늦었을 겁니다. 스크린이 채워지는 만큼 관객이 늘 여지가 남아 있으니, 지금 관계를 다져두는 쪽이 훗날 더 큰 문으로 이어집니다. 부산은 다 열린 시장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절반쯤 열린 문을 먼저 밀어보는 자리에 서 있는 셈입니다.
이 격차가 한국 독자에게 닿는 자리
이 이야기는 남의 나라 영화제 소식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 상영망의 한 축을 한국 기업 CGV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지 극장 시장에서 두 번째로 큰 사업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스크린이 부족한 시장이 채워질 때 그 과실의 일부가 한국 자본으로 흘러 들어오는 구조라는 뜻입니다.
정책 환경도 바뀌었습니다. 프라보워 정부가 조직을 개편하면서 인도네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부가 따로 생겼고, 영화를 문화 외교의 도구로 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세계 시장에서 공포 장르로 소비되던 현지 작품이 사회극과 예술영화로 폭을 넓히는 것도 이 흐름과 맞물립니다. 4관왕에 오른 ‘빵꾸(Pangku)’가 인도네시아·사우디아라비아 합작이었다는 점도, 공동제작이 이미 국경을 넘나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