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남아 합작영화, 한국 이름을 지워야 흥행한다?!

지난 6월 베트남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른 영화는 한국 제작사가 투자한 공포물이었습니다. ‘화씨저택(LẦU CHÚ HỎA)’은 6월 12일 개봉해 엿새 만에 1위를 찍었고, 일주일 만에 관객 50만 명을 넘기며 손익분기점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화면 어디에도 한국은 없습니다. 감독도 배우도 이야기도 전부 베트남 것입니다.

최근 한국-동남아 합작영화의 성적표는 이 대비를 계속 반복합니다. 한국 색을 지운 쪽은 기록을 세우고, 한국에서 통하던 공식을 그대로 옮겨 심은 쪽은 조용히 극장에서 내려옵니다.

성공한 합작은 한국이라는 이름부터 지워

‘화씨저택’은 하이브미디어코프와 런업컴퍼니의 현지 법인 런업베트남(RUNUP Vietnam)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소재는 호찌민 도심에 실제로 서 있는 건축물입니다. 99개의 문이 있다는 이야기, 흰옷 입은 여인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그 집에 붙어 다녔습니다. 제작진은 이 괴담을 파운드 푸티지 형식으로 옮겼고, 베트남에서는 이런 방식의 공포영화가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이 댄 것은 돈과 제작 노하우까지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규모가 더 큽니다. ‘기생충’을 만든 바른손이앤에이는 조코 안와르(Joko Anwar) 감독의 제작사 컴앤씨 픽쳐스(Come And See Pictures)와 2년 독점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첫 결과물이 ‘고스트 인 더 셀(Ghost in the Cell)’입니다. 4월 16일 개봉해 엿새 만에 100만 관객을 넘겼고, 3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누적 336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된 뒤 148개국에 선판매됐습니다. 한국 회사가 맡은 몫은 공동 제작과 해외 세일즈였습니다.

돈보다 소재의 국적이 흥행을 갈라

베트남 공포영화의 최근 기록은 대부분 민속 신앙에서 나옵니다. ‘피퐁: 블러드 데몬(Phi Phong: The Blood Demon)’은 북부 산간 지역에 전해지는 흡혈 요괴 전설을 가져왔습니다. 블루벨스 스튜디오(Bluebells Studios)가 제작해 4월 24일 개봉했고, 5월 말 기준 2,000억 동을 넘기며 베트남 역대 최고 흥행 공포영화가 됐습니다. 관객은 250만 명에 달했습니다.

CJ ENM의 베트남 법인 CJ HK 엔터테인먼트는 현지 제작사 856픽처스(856 Pictures)와 ‘마쏘(Ma Xó)’를 함께 내놨습니다. 집에 깃든 귀신을 다룬 민속 호러입니다. 6월 개봉 뒤 1,000억 동을 넘겼습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개봉 전에 이미 한국·미국·일본·태국·인도네시아 다섯 나라에서 리메이크와 개발이 확정됐다는 사실입니다. 수입하던 쪽과 수출하던 쪽이 뒤바뀐 셈입니다.

작품국가·개봉모델현지 성적
화씨저택베트남 · 2026.6공동 투자·제작박스오피스 1위, 50만 명
고스트 인 더 셀인도네시아 · 2026.4공동 제작·해외 세일즈336만 명, 148개국 판매
피퐁: 블러드 데몬베트남 · 2026.4현지 제작2,000억 동, 역대 공포 1위
7번방의 기적인도네시아 · 2022.9IP 리메이크585만 명, 역대 5위
사내맞선(A Business Proposal)인도네시아 · 2025.2IP 리메이크2만여 명, 일주일 내 종영
자료: 각 제작·배급사 발표 및 현지 보도, 2022~2026년 (사내맞선 관객 수는 민간 집계 시네포인트 기준)

현지 소재로 만든 네 편은 모두 백만 단위를 넘겼고, 한국 이야기를 옮겨 온 두 편은 585만 명과 2만 명으로 갈렸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리메이크한 사내맞선 'A Business Proposal'
인도네시아에서 리메이크한 사내맞선 ‘A Business Proposal’

‘사내맞선’을 망하게 한 것은 정서가 아니라 배우

2025년 2월 6일 인도네시아에서 개봉한 리메이크작 《A Business Proposal》의 첫날 관객은 6,000명 남짓이었습니다. 이튿날부터 상영관이 빠르게 줄었고, 일주일을 채우기 전에 스크린에서 내려왔습니다. 민간 집계 사이트 시네포인트(Cinepoint) 기준으로 2월 중순 누적 관객은 2만 명대에 머물렀습니다. 원인은 각색이 아니었습니다. 개봉 전 남자 주연 배우가 한류 팬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고, 팬덤이 불매로 돌아섰습니다.

넉 달 뒤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에 올랐습니다. 극장에서 2만 명을 모은 콘텐츠가 스트리밍에서는 정상을 찍은 것입니다. 같은 작품이 채널만 바꿔 결과를 뒤집었다면, 실패의 원인은 이야기가 아니라 티켓을 사러 갈 마음에 있었습니다.

리메이크 영화, 성공과 실패

‘A Business Proposal’을 만든 곳은 팔콘픽쳐스(Falcon Pictures)입니다. 그런데 2022년 9월 ‘7번방의 기적(Miracle in Cell No.7)’을 내놓은 곳도 같은 회사입니다. 이 영화는 관객 585만 명을 모아 인도네시아 역대 박스오피스 5위에 올랐습니다. 손익분기점이 140만 명이었으니 네 배를 넘긴 성적입니다. 같은 해 6월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 리메이크 ‘My Sassy Girl’은 15만 명에 그쳤습니다. 세 편의 제작사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리메이크는 통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데이터 앞에서 무너집니다. 편차의 폭이 너무 큽니다. 배경에는 제도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스크린쿼터로 수입 영화 상영 비율을 40%로 제한합니다. 한국 영화를 그대로 수출하는 대신 판권을 팔아 현지 영화로 개봉시키면 이 벽을 넘습니다. 리메이크는 취향의 선택이 아니라 제도를 우회하는 경로였습니다. 같은 경로로 대박과 참패가 나란히 나온다면, 갈림길은 원작이 아니라 그 뒤의 관리에 있습니다.

참패라고 쓰기 전에 숫자부터 확인해야

한국-인도네시아 합작 법정 스릴러 ‘판결(Keadilan)’은 2025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먼저 걸렸고, 이듬해 2월 한국에 개봉했습니다. ‘살인자ㅇ난감’의 이창희 감독과 현지의 유스론 푸아디(Yusron Fuadi) 감독이 함께 연출했습니다. 현지 반응에는 한 문장이 따라다녔습니다. 인도네시아 배우가 인도네시아어로 연기하는데 화면은 한국 영화 같다는 지적입니다. 이광수가 주연한 한-베트남 합작 ‘나 혼자 프린스’도 두 주인공의 감정선이 설득되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다만 두 영화의 흥행 수치는 공개된 어떤 자료로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에는 한국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같은 공식 집계가 없습니다. 관객 수는 배급사 발표나 민간 사이트 추정으로 떠돕니다. 흥행 참패라는 표현이 기사와 블로그를 오가는 동안, 그 표현을 뒷받침할 숫자는 대개 어디에도 없습니다. 근거 없는 실패담이 쌓이면 다음 기획이 잘못된 교훈을 배웁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국-동남아 합작영화의 성공 사례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크레디트에서 한국 이름을 찾으려면 한참 내려가야 합니다. 자본과 세일즈는 한국이 대고, 관객이 기억하는 얼굴과 이야기는 현지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습니다. 이름이 남지 않는 성공을 우리는 언제까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