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나이·족자카르타·말레이시아! 술탄이 다스리는 동남아 지역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왕은 상징입니다. 헌법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선을 긋습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는 이 선 바깥에 서 있습니다. 수백 년 된 이슬람 왕조가 근대 법체계와 맞물려, 상징을 넘어 공식적인 정치 권력을 그대로 쥐고 있습니다. 동남아 술탄은 그런 예외의 이름입니다.

세금 한 푼 걷지 않고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전제군주가 있고, 공화국 안에서 주를 실제로 운영하는 세습 행정가가 있으며, 아홉 왕이 5년마다 돌아가며 연방의 왕좌에 앉는 나라도 있습니다. 브루나이(Brunei), 인도네시아 요그야카르타(Yogyakarta), 말레이시아(Malaysia)를 나란히 놓으면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동남아에서 술탄은 왜 ‘군림’에서 멈추지 않는가

왕정이 남은 나라는 많습니다. 대개는 의례용입니다. 동남아의 왕들은 다릅니다. 식민 지배와 독립, 공화정의 물결을 다 겪고도 권력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떤 왕은 자원으로 권력을 샀고, 어떤 왕은 영토를 내주고 관직을 받았으며, 어떤 왕들은 권력을 서로 나눠 오래 버텼습니다. 살아남았다기보다, 근대의 법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리를 확정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브루나이: 세금을 걷지 않으니 권력을 나눌 이유도 없어

동남아에서 왕의 힘이 가장 센 곳은 브루나이입니다. 공식 명칭은 브루나이 다루살람(Brunei Darussalam), ‘평화의 처소’라는 뜻입니다. 지구에 몇 남지 않은 전제군주제 국가입니다. 술탄(Sultan) 하사날 볼키아(Hassanal Bolkiah)는 국가원수이면서 정부수반입니다. 입법·사법·행정이 한 사람에게 모입니다.

그는 총리를 맡고, 국방·재무경제·외교 장관을 함께 쥡니다. 1959년 헌법이 있지만, 1962년 선포된 비상사태가 지금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술탄의 초법적 권한이 그 위에서 이어집니다.

이 절대 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석유와 천연가스입니다. 정부는 국민에게 세금을 걷지 않습니다. 대신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각종 보조금을 줍니다. 세금을 걷지 않는 정부는 권력을 나눠 달라는 요구를 받을 일도 적습니다.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는 근대의 공식이, 여기서는 거꾸로 작동하는 셈입니다. 믈라유 이슬람 브라자(Melayu Islam Beraja), 곧 말레이 이슬람 군주제라는 국가 이념이 이슬람 규범과 왕실의 권위를 하나로 묶습니다.

족자카르타 크라톤 궁전
족자카르타 크라톤 궁전

족자카르타: 왕국을 내놓고 영구 관직을 받다

공화국인 인도네시아 안에도 법적 실권을 쥔 군주가 있습니다. 자바섬 중부의 요그야카르타입니다. 정식 명칭은 요그야카르타 특별지역(Daerah Istimewa Yogyakarta, DIY)입니다. 이곳에서는 술탄이 세습으로 주지사를, 파쿠알라만(Pakualaman)의 아디파티(Adipati)가 세습으로 부주지사를 맡습니다. 공화국 안에서 왕이 지방 행정 수반을 대물림하는 사례는 세계에서도 드뭅니다.

이 특권의 뿌리는 독립전쟁입니다. 1945년 독립 당시 요그야카르타의 술탄 하멩쿠부워노 9세(Hamengkubuwono IX)와 파쿠 알람(Paku Alam) 8세는 공화국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왕국의 영토와 행정망을 신생 정부에 조건 없이 넘겼습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는 그 보답으로 요그야카르타를 특별지역으로 지정하고, 세습 술탄과 세습 아디파티에게 주지사·부주지사 자리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 특권은 시간이 지나며 흐려지기는커녕 오히려 법으로 굳었습니다. 2000년대 후반, 중앙정부가 주지사 선거를 도입하려 하자 요그야카르타에서 큰 반발이 일었습니다. 결국 2012년 인도네시아 국회는 요그야카르타 특별법(UU No. 13/2012)을 통과시켜, 주지사와 부주지사를 선거 없이 술탄과 아디파티가 자동 승계한다고 못박았습니다. 관례였던 것이 조문이 된 셈입니다. 지금의 주지사는 하멩쿠부워노 10세, 부주지사는 파쿠 알람 10세입니다. 이들은 전통 지도자가 아니라 예산 집행권과 행정권을 쥔 공식 행정관입니다.

말레이시아: 아홉 왕이 5년씩 돌아가며 앉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가장 복잡한 입헌군주제를 운영합니다. 구조가 촘촘합니다. 13개 주 가운데 9개 주에 세습 말레이 왕가가 있고, 이들은 주 헌법에 따라 공식 권한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5년마다 자기들 중 하나를 연방 전체의 왕, 양디-페르투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으로 뽑습니다.

아홉 왕의 칭호는 한결같지 않습니다. 조호르(Johor)·케다·클란탄·파항·셀랑고르·트렝가누·페락(Perak)의 지배자는 술탄을 씁니다. 페를리스(Perlis)만 라자(Raja)라 부르고, 자말룰라일(Jamalullail) 가문이 다스립니다. 느그리 슴빌란(Negeri Sembilan)은 또 다릅니다. 이곳의 군주는 양디-퍼르투안 브사르(Yang di-Pertuan Besar)라 불리며, 세습이 아니라 지역 부족장인 운당(Undang) 넷이 왕가 안에서 뽑습니다. 아홉 주가 전부 단일 세습제인 것은 아닙니다.

왕좌를 나눠 앉는 방식은 그 자체가 생존 전략입니다. 한 가문이 연방 왕좌를 독점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현재는 조호르의 술탄 이브라힘(Ibrahim)으로, 2024년 1월 취임한 17대입니다. 5년 뒤에는 다른 주의 왕에게 자리를 넘깁니다.

이들의 권한은 의례에 그치지 않습니다. 선거 결과가 불확실하거나 정국이 교착되면, 술탄은 다수 지지를 얻을 인물을 판단해 주 수상(Menteri Besar)을 임명하는 재량권을 씁니다. 주 수상의 의회 해산 요구를 거부할 헌법적 권한도 있습니다. 여기에 각 주의 술탄은 그 주 안에서 이슬람과 말레이 관습의 최고 결정권자입니다. 샤리아(Sharia) 법원 운영과 종교 법령 승인에 강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실권’이라는 말이 세 나라에서 뜻이 갈리는 이유

동남아 술탄을 ‘실권을 쥔 군주’ 한 덩어리로 묶으면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브루나이의 술탄은 나라를 직접 통치합니다. 요그야카르타의 술탄은 한 주를 행정합니다. 말레이시아의 왕들은 평소엔 물러나 있다가 정국이 흔들릴 때 유보된 재량권을 꺼냅니다. 직접 통치와 지방 행정과 유보적 권한은 결이 전혀 다릅니다.

구분정치 체제핵심 권한권력 기반
브루나이 술탄전제군주제행정·입법·사법 전권석유·가스 자원, 종교적 정통성
요그야카르타 술탄·아디파티공화국 내 특별자치주 행정·예산권(주지사·부주지사)독립 기여에 따른 특별법
말레이시아 9개 주 군주연방 입헌군주제주 수상 임명·이슬람 수장·아공 선출주 헌법·연방법의 명문 규정
자료: 각국 헌법·특별법 및 준1차 자료 종합, 2026년 기준

같은 ‘군주’라도 브루나이는 통치의 정점에, 요그야카르타는 행정의 중심에, 말레이시아 왕들은 조정자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구분은 한국 독자에게도 실용적입니다. 요그야카르타를 여행하거나 사업으로 마주하는 사람에게, 그 지역의 주지사가 곧 술탄이라는 사실은 행정과 토지 문제를 읽는 열쇠가 됩니다. 실제로 요그야카르타에서는 토지 소유를 두고 원주민과 비원주민을 가르는 특례가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브루나이와 거래하는 기업이라면, 국가와 술탄이 사실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둬야 합니다. 협상 상대가 정부이자 왕실입니다.

동남아의 왕들을 전근대의 잔재로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근대의 법과 제도 안에 자기 자리를 새겨 넣었습니다. 다인종·다종교 사회에서 왕실은 국가 정체성의 구심점이자, 정국이 흔들릴 때 마지막으로 손을 대는 조정자로 남아 있습니다.